LDR009 : 우리들의
창조주는 전지하시는가?
우리들은
매스컴(Media)의 공상세계나
혹은 덧없는 세상의 일상적
활동들이 아니라 진실과
일상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란
것인가’라는 의문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창조주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만의
삶을 기준하여 답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활동과 말씀의 역사성을
앞의 여섯 개 비디오에서
논하였는데 이것은 그와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진정한 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여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실체를 공유하게 되며 또한,
우리가 애당초 그의
생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계속 생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창조주는
우리를 만드실 때 그가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자유의지를
부여해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생을 거부할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선택의 결과를
볼 수 있게 하셨으며 그 다음에
생이냐 무존재냐를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허용하셨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이 자녀들에게
이러한 자유의지의 특전을
부여하는데 얼마나 고통을
자주 감내해야 하였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세계대전과 국내분쟁으로
인한 많은 고통들을 자신의
마음속에 지녀왔음을 생각할
때 분명히 복잡다양하게
그리고 극심히도 끊임없이
증대되었습니다.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아셨을까요?
능력이 유한한 우리
인간의 마음도 어떤 자녀들이나
성인들이 아마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견하고 예지할
수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의 사랑은 그의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명백히
깨닫게 되도록 그 결과를
그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견디는 자발적 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가 미리
아신 것은 그가 미리 운명을
정하였기 때문이고, 그가 미리 운명을 정한
것은 그의 사랑이 대적을
참고 견디면서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창조주는
그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어떠한 존재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일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끈기에 대한 개념은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상대성을 가정하였을
때 과학적인 견지에서 분명하게
정의한 영원 세계의 실재로
말미암아 강화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시계
하나를 해면에, 또
하나는 산 정상에 놓고 여러
설명을 통하여 시간은 공간과
연관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영원은 시간을 포함하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은
우주의 장구하고도 괴로운
역사를 1천분지
1초 동안에 예견하시고,
자기 아들이 자신의
물리적인 육신의 모습으로
땅에 출현하여 수없이 많은
우리들의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셨고 그
모든 고통을 동시에 감당하셨습니다.
그가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들의 모든 순간 순간의
시간을 함께 하시는 한에
있어서 그는 그 때 그 때의
고통을 계속 감당하다가
드디어는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그가 우리들의
의지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생과 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아들과 우리들의
공허한 자아 사이에 참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불안정함을
잘 정리하십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절대적이며 근본적인
창조주요 우주를 떠받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여러분들의
확실한 자유의지가 틀림없이
여러분들의 내적 고결성과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심에서
유래되는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 자유의지는
그 근원이 되는 요소들을
운이라고 하는 어떤 추상적인
힘에 돌리는 데에서 유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운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어떤 힘이
최후의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들이
만든 우주에서 그 모든것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